
난 그냥 딱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래. 직장 다니면서 결혼하고 애 낳고.
야,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.
대통령이 될래요, 연예인이 될 거에요, 로켓을 쏘아 올리는 과학자가 되겠습니다, 라는 거창한 꿈을 품는 아이들이 어느덧 현실을 체감하게 될 때쯤 우린 스스로 ‘평범함’에 대한 꿈을 꾸곤 한다. 조금 더 세상을 빨리 알아버린 녀석은 그게 바로 어려운 꿈이라며 반박하고, 평범한 것에 대한 기준의 모호함과 생각과는 다르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.
경선(김민희)은 그걸 너무 빨리 깨닫게 된 여자다. 남들처럼 웃고, 남들처럼 행복한 가정에 남들처럼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.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문호(이선균)의 잘 먹고 잘 살자는 말에 그게 가능할까, 라고 되물을 정도로.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어, 라고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처절함이 묻어날 정도로. 사실 <화차>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영역 내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함께 고민한다.
원작이 있는 작품이 늘 그렇듯 소설을 영상화하는 작업은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한다. 물론 원작의 팬덤이 깊을수록 거부반응도 비례하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흥미로운 작업임에 틀림없다. 미야베 미유키의 <화차>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<향수>와 데니스 루헤인의 <살인자들의 섬>을 떠올리게 한다. <화차>를 포함한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추상성이다. <향수>에서 그루누이의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형상화되던 향의 세계가, <살인자들의 섬> 테디의 꿈에서 펼쳐진 그 이미지의 향연들, 그리고 <화차>의 세키네 쇼코가 떠올리는 행복의 이미지들. 이 모든 것들이 영상화됐을 때 어떤 방식으로, 어떤 툴로 표현될 것인가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 된다. 톰 티크베어의 <향수>와 마틴 스코세지가 <셔터 아일랜드>로 보여준 추상적 비주얼의 표현은 각자의 영역 내에서 놀랄 만큼 미학적이었다. 세키네 쇼코를 끌어올려 김민희를 내세운 것에 쇼코가 떠올리는 행복이라는 추상적 이미지의 영상화를 기대했으나 변영주 감독에게 그건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. 개인의 내면이나 상상을 구체적인 영상으로 발현하기보다는 인물과의 갈등에 집중한다.
영화는 원작과는 달리 각색의 힘을 빌려 결말을 뒤틀고 거기에 몇 걸음 더 나아간다. 영화적 타협이다. 원작의 결말을 영상화했을 때의 그 건조함과 담백함은 충분한 매력이 될 테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스릴러라는 장르에게 거는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기에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. 그 점에서 감독은 또 하나의 장치를 두고 다른 에너지를 쏟아내려 한다. 그 영화적 타협을 이해한다. 문제는 영화 말미에 쏟아지는 과잉의 연속이다. “나 사람 아니야. 나 쓰레기야.” 같이 한마디 한마디 무게감을 실어내려 하는 대사엔 작위적인 언어가 묻어나며 문호와 경선의 행위를 통해 쏟아내려 하는 에너지 또한 불필요한 힘이 실린다. 잔뜩 팽팽해져 불안불안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불다 터진 풍선을 보는 것 같아 너덜하고 시시하다.
원작에서 철저히 타자화됐던 쇼코를 끌어올린 건 좋다. 사실 영화는 원작인 책보다 훨씬 쇼코라는 인물에 집중한다. 김민희라는 배우의 행동과 표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고 마침내 팬션씬을 통해 개인의 딜레마를 극대화 시킨다. 곧 용산씬에선 경선과 문호의 대사를 통해 갈등의 흐름을 잡고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려 시도하는데 그러다보니 대사는 과잉의 언어로 점철되고 연출마저 그간의 흐름을 잃어버린 듯 휘청거린다.
화차는 물론 잘 각색된 영화다. 원작보다 표현의 밀도가 높았던 이창동의 <밀양>이나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정도로 잘 담아낸 이윤기의 <멋진 하루>처럼 각색만으로도 충분히 호평 받아 마땅하다. 하지만 그 과잉의 언어들은 미뤄두고 조금 더 담백함을 담아내기 위한 절제의 미덕을 발휘했어야 했다. 우리의 삶이 현명한 타협을 요구하는 것처럼.